#11 by mkim

퇴근 후, 잠깐 얼굴이 보고싶어서 바쁘냐고 보낸 메세지에 A는 집이라고 대답했다. 집이라 문자를 보내오는건 오프라는 뜻이었다. 내포된 의미는 잠이 필요하고, 자고 싶고, 잘 예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난 집에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의 2호선을 타고 잠실 나루로 향했다. 공동 현관문에 동호수를 누르니 한참 뒤에야 뭐야라고 말하는 A의 잠긴 목소리가 들린다. 삐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아주머니는 볼일이 있으셨는지 안계셨다. 대충 가방을 내려놓고 마이를 벗었다. A는 마루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날 보더니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시키는 대로 가서 A의 옆에 앉았다.

"아줌마는 역시 깔끔하시다."
"응."
"집에 언제 왔어?"
"풀당 서고 점심 때 왔어."
"쭉 잠만 잤어?"
"응. 너무 피곤해."
"난 너 보고 싶어서 왔어."
"피이, 알아."

화제가 없었다. A는 옆으로 누워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고, 난 방문 밖으로 보이는 거실을 둘러보며 입 다물고 앉아 있기만 했다.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침묵이 우리를 가만히 감싸오는 느낌이랄까. A는 몸을 뒤척거리더니 몸 아래 깔고 누웠던 이불을 어깨까지 덮었다.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째각 지나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A는 꿈뻑꿈뻑거리더니 금방 잠이 들었고 코도 골았다. 그리고 자기 코고는 소리에 깨기를 반복했다. 난 손등으로 살며시 A의 뺨을 쓸었다. 그러자 A가 완전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말없이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난 몇번 더 A의 뺨을 만지고는 이번엔 눈을 비비며 눈꼽을 떼고 있는 A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A의 눈을 쳐다보며 손바닥에 입 맞추었다. 간지러운 듯 A는 살짝 손을 빼려다 말았다. 

"어때?"
"음, 몰라."
"싫어?"
"싫지는 않은 것 같아." 

그 표현이 웃겼다. 그리고 가슴이 한순간 일렁이듯 요동쳤다. 공기가 점점 더워지는 듯 했다. 난 천천히 A의 얼굴에 다가갔다. A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입술만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A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고 난 다시 A의 입술에 닿았다. A의 입안으로 조심스럽게 혀를 넣었다. 따듯하고 물컹한 것이 내 혀에 닿자 느낌이 아주 묘했다. 간지르며 입안을 훑고 지나가도 부드럽게 받아주는 느낌이 처음에 강제로 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조금씩 요란하게 심장이 뛰고 온 몸이 천천히 뜨거운 물에 젖어가는 듯 찌릿찌릿 해왔다. 맛만 보는 듯 애태우던 A의 입술이 서로의 타액에 젖은 소리와 함께 아쉽게 떨어졌다. 눈을 뜨니 A의 얼굴이 비스듬하게 보였다. 베게 1개를 A의 뒤에 받쳐주고 자리를 재정돈해 좀 더 편한 자세를 만들었다. A는 내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번엔 A 쪽으로 더 바싹 붙어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어왔다. 이번엔 좀 더 깊이 들어갔다. 지난 10년의 시간, 그 동안 매일 밤 내가 꿈꿔왔던 그 장면이 현실이 되었다. 말할 수 없이 묘한 느낌이었다. A는 두 손으로 내 옷깃을 쥐었다. 내 고개가 다른 쪽으로 틀어지며 각도를 달리하자 A가 흡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받아주었다. 조금씩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A는 숨이 차는지 슬며시 나를 밀었다. 난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입을 떼고 나니 나 역시 조금 가쁘게 숨을 쉬었다. A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으로 반질반질하게 된 입으로 작게 숨을 몰아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섹시한 모습이었다. A가 완전히 숨을 다 쉬기도 전에 내 입술이 다시 덮였다. 지금까지는 두개의 베게에 기댄 자세였지만 아까보다 좀 더 센 힘으로 A의 어깨를 잡고 눌러 침대에 눕혔다. 베게 밑으로 미끄러졌다. A의 뒤통수에 침대 시트가 닿고, 그대로 난 깊이 키스해 들어갔다. 앉아서 할 때보다 더 농도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가슴 밑에서 A의 존재가 고스라니 느껴지고 다리가 서로 얽혀 들었다. A와 닿아있는 모든 곳에서 열이 나면서 세포가 분열하는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느껴지는 A의 숨결이나 따듯한 체온 같은 것에도 녹아버릴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난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어가며 점점 더 깊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내 허리를 잡았다가, 침대 치트를 팡팡 쳤다가 어쩔 줄 몰라 헤매고 있던 A의 양팔을 슬그머니 들어올려 내 목을 껴안게 했다. A는 어느새 내게 폭삭 안겨 매달려서 키스하고 있었다. 나도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A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만지면 만질수록 A는 정말 마른 몸이란걸 느끼게 되었다. 티셔츠 안으로 손을 깊숙히 넣어 A의 등에 닿았다. 날개뼈를 네개의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그리고 점점 몸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으면서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A와 나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나는 음란한 소리조차 이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 못차리게 기분이 좋아져왔다. 눈이 시릴 정도였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붙어서 키스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움직 거릴 때마다 허벅지께에 닿아오는 딱딱한 것에 놀라 A는 입술을 떼었다. 민망했다. 난 멋쩍게 웃어보였다. 내 웃는 모습에도 A는 겁이 났는지 불안한 표정이 얼굴에 보였다.

"괜찮아. 이건 이따 내가 해결할꺼야."

내 입에선 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A의 눈치를 잠시 살핀 뒤, 다시 입술을 부딫혔다. A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좋은걸. 그땐 왜 그랬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아슬아슬 선을 넘을 듯 말듯한 기분으로 내내 키스만 하던 우리는 아주머니가 귀가했음을 알리는 긴 비밀번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A의 위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나는 그와 거의 동시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다. A의 아주머니가 집에 들어서며 A 왔니? 어머 또 누구 왔나보네? 하고 말하는게 들려왔다. 방문도 열려져 있었기에 우리는 순간 당황해서 서로 쳐다보기만 하다가 당장 침으로 흥건한 입부터 닦았다. 그리고 A는 나도 모르게 풀어헤친 내 셔츠의 단추를 서둘러 잠가주었다. 대충 옷매무새를 수습한 나는 먼저 밖으로 나가서 아주머니께 인사했다. 늦었지만 저녁 전이면 먹고가라는 말에 아니라며 지금 집에 가려고 했다고 말씀을 드렸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 A가 배웅한답시고 얼른 따라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현관문을 완전히 닫고 나서야 우리 둘은 휴우 하고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찬바람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천천히 식는 듯했다.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새빨간 A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난 손가락을 굽혀 A의 입술을 몇번 건드렸다. 부끄러운 듯 A는 베시시 웃는다.

"다행이다."
"더 했다가는 니 입술 다 불어터질 뻔 했어."

A의 귓가에 속삭였다.


#10 by mkim

"뭐?"
"I가 이상하다고"
"그 놈이 원래 멀쩡한 놈은 아니었잖아."
"그랬나? 아냐, 너를 만나더니 물든거야."

나는 허락도 없이 슬쩍 A의 손을 잡았다. 슬그머니 A가 나를 흘겨 보았다. 아무 관심 없는 척 담담하게 걸었다. 그러다 슬쩍 A 쪽을 쳐다보았다. A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위로 들었다 내렸고, 난 피식 쪼개며 시선을 돌렸다. 하아,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랑스럽니? A는 의아스러워하며 이번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난 웃으며 몇번인가 고개를 저으며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고백하듯 A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가슴 떨리니까 그렇게 쳐다보지마."

이렇게 오글거리는 대사를 입 밖으로 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A는 아무렇지도 않는 양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웬 딴소리야. 뭐가 가슴이 떨려."
"떨려."
"천하의 mkim이?"
"니 앞에서는 언제나 떨리고 있어."

아아, 얼굴의 붉어짐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A는 큼하고 한번 멋쩍게 목을 가다듬더니 저녁 먹으러 가잰다. 그러고보니 갑자기 배가 몹시 고프다. 고민을 했더니 허기가 지나? 나는 잠자코 A가 가자는 데로 따라갔고, 고기를 구워 월남쌈을 싸먹는 베트남 요리집으로 갔다. 이것저것 접시가 나오자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많이 구워, 앞에 있는 사람의 젓가락이 심심하지 않게 쉴 틈 없이 잘 굽는다며 A가 가위와 집게를 가져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가만히 앉아 A가 하는 데로 접시에 받아 냠냠 맛있게 먹었다. 어느정도 고기가 다 익자 A는 불판의 가장자리에 고기를 원형 대열로 놓고는 월남쌈 예찬을 시작했다. 세상에서 이처럼 뒤끝이 깔끔한 요리가 없다느니, 자기는 손가락이 뿌는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다느니, 스위트 칠리 소스를 집에 쟁여놓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조잘조잘 해댔다. 세상엔 참 맛있는 요리가 많구나. A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것저것 열심히 싸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A를 바라보니, A도 말을 멈추고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A는 베시시 웃었다. 나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맛있어."
"많이 먹어."

#9 by mkim

난 일단 확실히 노선 변경을 하기도 결심했다. 그러나 비단 손수건도 길바닥에 구르면 걸레가 되듯, 진정한 온건 노선이란 내게 적용되어 본 의미에서 한참이나 변질된 어처구니없고도 아주 곤란한 형태의 결과를 낳았다.

"전화 좀 그만 해."
"너 왜 전화 안받았어!"
"바보냐? 나 인턴이야. 외래 중에 받으면 쌤한테 얻어맞어!"
"아니 감히 누가 우리 A를! 나한테 얘기해. 내가 경찰에 찔러줄게."
"웃겨 니가 전활 안하면 간단하잖아. 전화 하지마. 끊어."
"보고싶어."
"그제도 봤고, 오늘 아침에도 봤잖아."
"그래도 보고 싶어."
"에이씨, 끊어!"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냉정한 대사를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A와의 통화 끝에서 나는 늘 서글퍼진다. 화장실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날 아는 한 동료는 내 목소리를 흉내내며 '그래도 보고싶어~'라며 신나게 비비꼬았다. 아, 정말 A때문에 얼마나 스타일 구기는지. 밉다 미워.

열이 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J는 다른 동료와 시시덕거리다가 내가 자리에 앉자 이쪽으로 와서, 내 옆에 슬그머니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책상에 쓰러지듯 어어지며 말했다.

"골치 아파 죽겠어."
"왜?"
"아침부터 틈 날 때마다 계속 전화를 하는데, 애가 잘 안받아."
"그때 그 고등학교 동창?"
"응...응?"

가만, 얘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난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며 심하게 당황되기 시작했다.

"아, 그게 얘가 우리반 반장이었거든. 동창회 관련해서 일이 좀 있어서. 그러네."
"아 그래."

J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J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J는 역시 여느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단정한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지난번 A와의 소개팅을 중간에서 잘라먹은건 아무것도 아닌 일일까 묻어둬야하는 일일까. J는 별다른 말없이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느슨하게 걸쳐 앉아있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8 by mkim

예전에 기억나? 고등학교 1학년 6월인가 5월인가였는데 한밤중에 우리 집에 찾아왔었잖아. 그 시간에 어딜 싸돌아 댕겼는지 온 몸이 물에 빠진 쥐새끼 같은 꼴을 해서는. 그치만 너 울고 있었어. 얼굴도 죄다 비에 젖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엔 그게 보였어. 그런데 너를 나를 보고 웃으면서 하루 재워달라고 했지. 나는 엄마 몰래 너를 얼른 방에 들어오게 했어. 원래도 하얀애가 더 하얀 얼굴을 해갖곤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지 않겠어? 난 놀래서 머뭇거리다 일단 수건을 가져와 니 몸에 걸쳐주었어. 넌 내가 그러는 동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더라. 그냥 우두커니 서서 내가 수건을 둘러주도록 내버려 두더군. 누나한테 네가 내 방에 있는 걸 알리면 옷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내 옷장에서 옷을 꺼내주자 넌 그저 고맙다고 말했어. 네가 옷도 갈아입어야했고 따뜻한 것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부엌에 나가 물을 끓였어. 물 조절을 못해서 몇잔을 버린후에야 한잔의 코코아를 어설프게 끓여다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넌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었어. 타잔이었던가. 평소엔 유치하다고 그렇게 하지말라더니. 어쨌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순 없었어. 내가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자 너는 말했어.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했지. 사실 그때 보충수업을 튄 벌로 받은 기합때문에 한참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거든. 그런데 니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며 다시 울기 시작하는 거야. 너무 당황해서 왜 그러는지도 물어보지 못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니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묘하게 파고 들어오더라. 꼭 내가 우는 것처럼. 처음으로 가슴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받았어. 태어나서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지. 니 사이즈보다 훨씬 큰 내 티셔츠를 갈아입은 너의 작은 어깨가 작게 떨리며 들썩이는 모습이 눈에 시리도록 박혀 들어와 뚜렷하게 내 머릿속에 새겨졌어.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 다가가서 어깨라도 토닥이며 위로해줬어야했는데 뭐 그런건 몇년 뒤에나 깨달았어. 어쨌든 넌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편에 앉아 그저 널 바라보고만 있었지. 그러는 동안에 너를 향한 이상한 감정이 마음 속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니가 다 울고 나서 뒤돌아보며 애써 웃어줬을 때는 이미 그 감정이 내 가슴 속에서 완성되어 어떻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존재 그 자체가 되어있었지. 정체도 알 수 없고,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는. 너는 졸리다며 내 침대에 올라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어. 나는 그 이상한 기분에 잠시 가슴을 어루만졌지만 당시에는 그게 뭔지 몰랐기 때문에 더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어. 내가 불을 끄고 니 옆에 나란히 눕자 니가 애처럼 내 옆에 찰싹 붙어 오더라. 나는 어정쩡하게 불편한 자세로 누워있다가 결국 팔을 꺼내 너를 안았지. 너는 아직 차가웠지만 내가 따듯하게 해줄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묘한 자신감으로. 넌 그렇게 내 품에 안겨 금방 잠들었어. 아마 우느라 피곤했었나봐. 근데 그 때말이야. 내 가슴속에 가득차 꿈틀대며 불안한 운동을 하던 그 감정의 존재가 갑자기 빛을 내며 펑하고 터져 올랐어.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를 사랑해주지. 내가 너를 사랑해 줄게.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러자 갑자기 가슴 속에 행복감이 넘실넘실 차올랐어. 어째서 내가 그 때, 하필 너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건 멈출 수도 끝낼 수도 없는 일이었지. 시작이었던 거야. 자니? 자? 훗, 넌 꼭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먼저 자버리는 구나.


#7 by mkim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A도 단단히 삐쳐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걸고 풀어줘야할지가 고민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A가 와 있었다. 방문을 열고 앞머리까지 다 올린채 츄리닝 바람으로 편하게 있는 A를 보는 순간 심란한 마음은 금세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미묘한 심장의 울림만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A는 내게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그래서 나도 따라 웃으며 인사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A에게는 묘하게 사람을 기분좋게하는 재주가 있나보다. 나를 보고 있던 A는 급하게 마트에서 사와 미리 냉동실에 넣어놓은 걸로 보이는 맥주를 냉장실로 옮기고서는 맨발로 바닥을 총총총 걸어서 침대 위에 앉았다. 등을 벽에 대고 침대에 앉아서는, 발 닦고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내게 이야기했다. 

A의 집도 자주 갔었고, 내 집을 A가 방문한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A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비교해 달라진게 하나도 없는데 나만 민감하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씼으면서도, 집을 드러설 때 나를 바라보고 웃던 A의 모습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그 모습이 야했다.
 
우리는 앉아서 오랜만에 영화 관람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니까 A가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는 사이 내가 A의 뺨에 뽀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A에게 한대 맞을 것 같았지만, 난 얼굴 바로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외로 손이 날라오지 않자, 능청스럽게 말했다.

"계속 봐."
"너 같으면 보겠냐?"
"간단하게 굶주린 자 앞에 놓인 탐스러운 복숭아 같은 거야. 너 같으면 군침 안돌겠니?"
"네 말은 어딘가 너무 야해."
"익숙해지면 괜찮아."

A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넌 나한테 그런 생각밖에 없지?"
"그런 생각밖에 없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체, 못하는 말이 없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은 거야."

난 A의 손을 잡고는 짐짓 진지한 척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A는 나를 외면하며 대꾸했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랑 많이 해."
"우린 키스도 했는데"
"그건 니가 강제로 한거잖아."
"이번엔 제대로 해줄게.'

가슴이 뛴다. 앞으로의 일에대한 설레임인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인지 강심장이었던 나를 심난하게 만드는 A가 괜시리 밉다. A는 옆으로 자리를 이동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싫어."
"잘해줄게."
"뭐야, 어디서 연습이라도 했다는 말투네?"
"니 생각하면서는 많이 해봤어."
"뭐?"

A가 당황하기 시작한다. 분명 얼굴도 빨개졌겠지. 평소 섹드립을 많이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일뿐더러 승부욕하면 시체인 A인지라 내 말에 당황했다는게 분했는지 강수를 던진다. 

"내 생각하면서 자위도 했어?"
"안해본게 없지." 

내 대답에 말을 잃고 심하게 정색을 하고 있는 A의 얼굴을 보자 나도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런 표정을 지을 것까지야."
"그러니까 그동안 나는 네 성적망상의 오케이마담 취급이나 받고 있었단 말이지?"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말을 내 앞에서 당당하게 해?"
"그러니까 그건,"
"너 변태야?"
"말이 심하다."
"변태 맞네! 맨날 그런 걸로만 머리가 꽉 차 있잖아."
"남자야 당연히 섹스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게 정상 아냐?"
"야! 지금까지 했던 농담들도 그럼 다 진심이었냐? 난 그것도 모르고 너랑 히히덕거린거야?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내 앞에서 막해?"
"너랑 하고 싶으니까!"
"미쳤어?"

A가 기겁하며 소리 질렀다. 나도 한계였다. 순간 필름이 끊긴 다는 것처럼 검은 화면이 머리속에서 깜빡했다.

"그래! 너랑 손잡고, 껴안고, 만지고, 비비고, 입술이 다 불어 터지도록 키스하고, 거기가 다 뭉게지도록 넣고 흔들고 싶다. 나는 너랑 그런 짓들을 하고 싶다고!"
"으아악! 어떻게 그런 말들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해?"
"왜? 뭐가 어때서? 좋아하면 당연히 하고 싶은거야!"
"이 짐승자식아! 방에서 당장 나가!"
"싫어! 못나가!"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A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약이 올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딜 누워? 옮아!"

A는 내 몸을 일으켜 끌어내려고 했지만, 난 대자로 뻗어서 침대 양 끝을 단단히 쥐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한참을 끌어내고 버티기에 옥식각신하다가 결국 먼저 포기한 A가 말했다.

"좋아. 여기 네 집이라 이거지? 그럼 내가 나간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찰나 내가 A의 팔을 나꿔챘다.

"어딜 나가?"
"놔아!"
"못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일어서려는 A의 양팔을 잡아다가 침대 위에 눌러 앉혀버렸다. 침대가 반동으로 출렁했다. 그러는 통에 난 또 A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A는 화가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화가 많이 났지만 애써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내 맘을 몰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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